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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4월 18일 오후 8시, 성금요일예배
성경본문 : 요한복음 19:30
설교제목 :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빌만이라는 성가 가수가 어느날 놀라운 연주를 하면서 앵콜 앵콜 하며 그 무대에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마치고 분장실로 돌아왔습니다.
분장실에 들어선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봉사요 귀머거리였습니다.
그 여인이 빌만에게 부탁을 합니다.
나를 위해서 성가 한 곡을 불러주지 않겠습니까, 라고
그래서 빌만은 흑인 영가 가운데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는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 그 여인은 귀머거리였고 봉사였기에
그의 목에 손을 대고 목청의 떨림으로 음을 감지합니다.
빌만이 노래를 다 끝냈을 때 그녀는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 나는 수없이 많이 자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나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다시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 여인이 헬렌켈러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로마의 사형수로 처형을 받으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던 나이가 33세였습니다.
당시 이단 중에 예수님의 삶을 실패로 규정을 하며 육신의 삶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실패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본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은 죽음을 실패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 선언을 하십니다.
33세라고 하는 나이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 이 나이 때는 내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임종 직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얼마를 살았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무엇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삶의 모양을 가꾸는 데 아름다운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움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서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느냐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실패가 아니라는 말이죠.
여러분은 오늘 걸려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고통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거 당연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거기에서 머물고 있다면 여러분은 반쪽짜리 복음을 느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이지만 승리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피흘림이 있지만 십자가는 부활을 또한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 앞에 선 우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가야바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누가 심문을 하는지 오히려 예수님이 가야바를 심문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우리는 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놀랄 만큼 위엄과 고요와 넘치는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보이는데 가야바의 얼굴 속에는 불안과 초조한 모습이 넘쳐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가야바가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 같은데
내용 상으로는 가야바를 향하여서 오히려 양심을 묻고 있는 그러한 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시간이 좀 됐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울지 마 톤즈라고 하는 영화
이런 내용입니다. 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에 톤즈라고 하는 작은 마을, 그 마을 속에 브라스밴드가 마을을 행진하게 되는데 한 사람의 사진을 들고 행진을 합니다.
환하게 웃는 사진 속의 남자,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다.
그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매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마지막 세상 길을 떠나는 그분은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이태석 신부입니다.
그는 톤즈의 아버지요 톤즈의 의사요 톤즈의 선생님이요 톤즈의 지휘자요 건축가라고 불리는 신부 이태석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들을 사랑했고 헌신적으로 그들을 위해서 살았던 모습들이 스크린에서 펼쳐지게 됩니다.
영화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꽃 같은 청춘을 아프리카에서 정말 보석같은 달란트를 그곳에 다 쓰고 간 사람,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암으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분을 어느 누구도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심문하지도 않습니다.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이태석 신부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슬픈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행복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그의 삶을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다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요.
십자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져야 하는 것이 미완성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요한계시록 21장 6절을 보시면
[계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그리고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숨지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였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뭘까?
저는 그분이 끝난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끝났다 이야기할 때 나는 다시 시작한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늘의 소망을 품고 가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 라는 것.
오늘 마지막 말씀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장 와 닿는 단어가 뭡니까?
저에게는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영혼을 부탁할 분,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가요.
여러분,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을 보십시요.
사람들앞에서 돌을 맞아 죽습니다.
사도바울은 칼로 목이 배여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에 이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요 그것이 바로 승리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신앙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까?
우리 유연숙 성도님은 오늘 세상을 떠난다면 남편과 처자식을 맡길 사람이 있습니까?
오창연 장로님은 처자식 맡길 사람이 있습니까?
함석헌 선생이 이야기하죠.
내가 마지막 죽는 날, 내 처자식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성공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이루었다 또 많은 것을 가졌다 그게 아니예요
마지막 순간, 내 남은 생명들을 더 나아가서 나를 맡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있느냐?
김대중 성도님은 아직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신앙생활 더 해야 된다고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그렇죠?
제가 나이가 들고 보니까 가끔 몸이 아플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맡고 있는 모든 생명들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을까?
사실 그 문제가 해결된다면 세상은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 자체도 슬퍼하고 힘겨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건 뭡니까?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주시는 것의 핵심은
바로 우리는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겁니다.
누구를? 내 사랑하는 모두를 그리고 내 자신을
그리고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향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은 시편 31편 :5 말씀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말씀
이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시편 31:5의 말씀을 자기 자녀가 잠자리에 들어 밤을 맞이할 때 반드시 이 시편을 암송하면서 기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어두운 밤이 도착하기 전에 제 영혼을 주님 손에 맡기나이다, 라고 아이들이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도전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여러분의 삶과 죽음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 되길 바래봅니다.
적어도 우리는 마지막 때에 우리 영혼을 담대하게 그리고 우리의 남은 생명들을 담대하게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일을 우리에게 큰 감명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죽음이라는 것이 이제 하나님께 맡긴 그 순간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통하여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시간을 맞이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간직하면서 여러분 인생에 강력한 도전이 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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