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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가운데 살기, 요한복음 14:8-10 윈도우 XP 익스플로러8 에서는 지원이 되지 않습니다. 윈도우7 이상 지원됩니다. 윈 XP 환경에선 구글크롬(Chrome)을 설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원가능 환경 : WINDOWS7 이상(익스플로러9이상), 크롬, 사파리
설교말씀을 mp3로 듣기 쉽지 않은 상황의 지체들을 위해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최대한 정리하여 싣습니다.^^ ---------------
일시 : 2025년 5월 18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본문 : 요한복음 14 : 8-10
설교제목 : 은혜 가운데 살기
[요14:8-10]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오늘은 5 18 광주민주화항쟁 4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날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지만 무참하게 짓밟혀 그들은 고난과 억압 가운데 많은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희생을 통하여서 오늘 우리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삼일운동 ,4 19 혁명, 5 18 광주민주화항쟁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장한 전통이 어느 순간 흩어지고 안락에 길든 사람으로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기뻐했고 무역 강국임을 내세웠고 세계 초일류 기업을 이루게 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외국인들은 12 3 내란 사태를 보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당신 나라에서 벌어질 수 있느냐고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부디 모퉁이돌인 주님과 잇댄 채 저는 우리가 이제 새로운 나라를 향하여서 부단히 걸어가야 될 시기가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오랫동안 교회 봉사해온 한 집사의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교회 가운데서 주어진 일들을 참으로 기쁨 가운데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봉사의 삶이 굳어진 모습 가운데 결국은 형식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었고 영적인 기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의무감만 자기 마음 속에 가득하게 남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의미한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높아져야 되는 그러한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지고 결국에는 봉사를 통하여서 자기 자신의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 빌립이 예수님께 묻는 물음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요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의 이 물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무척 답답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대답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뭐가 답답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하는 것 같고 그분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은데 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뭔가 대상화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보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면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신앙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무엇인가 해야만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서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행위나 의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뭔가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좋은 부모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남자, 착한 여자, 착한 부모, 착한 자식 콤플렉스에 걸려 있습니다.
콤플렉스라는 게 무엇입니까?
단점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단점을 이기려는 것이 늘 우리 마음 속에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콤플렉스를 이겼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콤플렉스가 그대로 우리 마음 속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은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도 철이 들면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자식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을 들여다볼 때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서 뭔가 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우리는 자꾸 자꾸 지쳐 간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절대로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을 일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감을 유지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될까, 일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서 무엇을 하려고 애쓰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엄청난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여러분, 우리는 빌립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이 어떤 분인지 보여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모에게 이런 요구를 하지 않습니까?
아빠 엄마, 나 사랑해? 그 사랑을 보여주세요 라고
그때 부모는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애야. 꼭 그것을 보여줘야 믿느냐? 지금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지 않느냐?
빌립의 물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보여 주세요.
빌립아 내가 늘 하나님과 함께 있어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시는데 무엇을 보이라고 하느냐?
네가 나를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란다. 그냥 나와 함께 있으면 안되겠느냐?
그냥 나와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 안되겠느냐?
스티븐 멕베이가 쓴 은혜가 다스리는 삶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무척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29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줄곧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사는 법을 배우려고 성경을 읽었고 또 법칙을 꼭 지키겠다고 정기적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나의 신앙의 신념이 무엇인지 공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으리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살다보니까 그는 율법에 젖어서 율법의 틀 속에서 자기가 살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해야 된다는 그의 모습 속에서 그는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그의 삶의 모습이 그를 풍요롭게 한 것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문제로 그의 인생을 변질시켜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삶을 점검하기 위해서 성경을 펼칠 때마다 스스로 온전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또 다른 계명을 발견하게 되면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영적 수준이 너무나 멀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자기 모습이 분명히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사는 데 늘 쫓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늘 원칙을 지키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려고 구상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은 속임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고백은 스티븐 맥베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교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면 섬길수록 제게 비춰진 모습은 뭐냐?
기쁨보다는 자유로움보다는 더 좌절감 속에 묻혀 있는 그런 모습을 볼 때가 더 많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까?
나를 위해서 뭔가 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냥 나와 함께 살자.
목회자로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 애쓰는 모습, 참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때로는 그러나 지나친 모습을 갖게 될 때 저러다가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제가 늘 바라는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사랑을 알면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성도가 되면 참 좋겠다.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그 시간 속에 머물지 못하고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이것 해야지 저것 해야지 의무감 속에서 교회가 안식처가 아니라 오히려 교인들에게 피로감만 더해주는 그러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로 은혜 가운데 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오해가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복종함으로 열매를 맛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나서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참, 신앙생활 하면서 참 많이 결심을 해요.
예수 믿으면 이제 이런 것은 다 끊어야겠다고 얼마나 많이 애를 씁니까?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보다도 사실은 더 우리를 무겁게 한다는 겁니다.
미묘하지만 순종과 복종의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그분을 느낄 때 이렇게 살아가야되겠다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종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이 이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이제 이렇게 살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예수님의 기준에 맞추려고 따라가는 시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옳은 일을 따라 살아가려는 시도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늘 부담으로 존재하는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거하는 지체가 될 뿐이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비신앙적인 모습을 지닐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일예배 참석하는 것 의무입니까?
전 여러분이 의무감에서 교회에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빠졌습니다.
선거 업무에 종사하기 위해서 일터에 가신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일터에 간 한 사람이 주일을 반드시 지켜야 되는데.. 라는 의무감 속에 있다면 얼마나 그 마음이 불안하겠습니까?
여러분, 예배라는 것은 뭐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면서 그분을 누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냥 와서 찬양 부르고 목소리만 가지고 기도하고 그리고 봉사하고 가는 게 아니예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면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 가슴에서 그를 향한 마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 그런 이야기는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사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고 한다면
이 땅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러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느끼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얼마 전에도 성도들과 홍천에 다녀 왔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그들과 함께 동행한다는 게 참 기뻤습니다.
참 잊혀지지 않는 마음의 평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과 걸어간다는 것,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찬송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런 삶을 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런 삶을 누리는 여러분이 꼭 되기를 빕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타울러가 라인 강변이 혼자 산책을 하면서 깊이 묵상을 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언제나 기쁩니다.
내게는 모든 날이 선합니다. 나쁜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그러자 타울러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자 노인은 유쾌하게 대답합니다.
지옥에 어디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어디 곳에 가든지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주님도 함께 갑니다.
주님 없는 황금의 천국에 가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불구덩이 지옥에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랬으면 좋겠어요. 소망.
지난 한 주간도 한 성도를 만나서 아파하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지 간에 그 삶의 자리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여러분들을 껴안고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여러분이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나님도 똑같아요.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기 원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감 가운데에서 여러분이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예수 믿는 비밀이 그겁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옆에 붙어 있는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그를 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큰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머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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