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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1:23 윈도우 XP 익스플로러8 에서는 지원이 되지 않습니다. 윈도우7 이상 지원됩니다. 윈 XP 환경에선 구글크롬(Chrome)을 설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원가능 환경 : WINDOWS7 이상(익스플로러9이상), 크롬, 사파리
설교말씀을 mp3로 듣기 쉽지 않은 상황의 지체들을 위해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최대한 정리하여 싣습니다.^^ ---------------------
일시 : 2022년 12월 25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본문 : 마태복음 1:23
설교제목 :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코로나19 가운데에서 가장 희생이 큰 분야가 우리 교회학교 분야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사들과 더불어서 이 교회학교를 일으키기 위해 오늘도 기도하면서 불철주야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그것이 오늘의 한 결실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하람이가 예배 시간에 종횡무진하며 다녔는데
이 아이가 이제는 피켓을 들고 한 일원이 되어서 딱 서 있다는 것이
참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면서 뭔가 또 새로운 느낌을 갖게도 합니다.
아무튼 교회학교 교사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한 번 힘찬 박수를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의 은총이 모두에게 임하기를 빌어 봅니다.
우리가 부르는 이 기쁨의 노래가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들에게도 가슴 속에 울려퍼지는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대림절기를 고요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함께 한 모든 구성원들이 첨예한 사회적 갈등 속에서 너무나 적나라하게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임하는 모든 어두움과 고통을 생각해 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어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0 29 참사로 자녀를 잃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악재를 당하는 사람들,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들, 부모님이 없거나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크리스마스의 광명이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이전보다 더욱 밝게 비춰주기를 기원해 봅니다.
신앙의 작가 헨리 나우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예술과 영적 생활에 대한 모임에 참석했을 때에 옆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나우웬에게 불평스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다니던 교회의 정책이 저와 맞이 않아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몸을 돌려 말을 했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주의를 산만하게 할 뿐입니다.
당신의 불평을 모독하거나 반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들은 다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과 예수님의 관계일 뿐입니다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매일 오분씩 조용히 앉아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기도하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그런 후에 나에게 와서 무엇이 중요한지 말씀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이런 말입니다.
우리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임마누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탄의 약속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마지막에 제자들의 약속하신 말씀과같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할 수 감당하는 시간 동안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않고 너희와 함께 하겠다라고
약속해주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임마누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어려움 속에서도 생각과 문화가 어떻게 변하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어떤 고난과 어떤 역경 가운데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든 것을 지켜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일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문제는 희망을 갖지 못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몰트만이라는 학자는 죄를 정의하기를 희망을 갖지 않는 것, 체념, 자기 비하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간은 한때 과학의 힘으로 이 땅에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살펴보십시오.
인간의 오만된 모습은 오히려 과학이라는 것을 통해 무서운 전쟁 무기를 만드는 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오만 뒤에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절망입니다.
과학이 제시했던 미래의 꿈이 깨어지고 현대인들은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을 부르셔서 구원과 희망이 자기에게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땅의 것에서 희망을 잃은 인간을 향하여서 하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은 그리스도에게 집약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주려고 준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은총들이 우리의 것으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절망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이 도래하게 되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용서 없이 우리는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고
죄사함이 없이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우리 존재가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사함이 없이 우리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젊은 육상 선수가 올림픽에서 명성을 얻은 뒤에
성공 소감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는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나와 함께 달려주셨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승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스포츠 해설가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나님이 함께 달리셨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왜 우승을 해야 되는지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의미를 알고 내가 달리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 가운데 내 발걸음에 힘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자주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라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하루 하루의 삶의 기적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능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라는 임재의 사실을 느껴야 한다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마지막까지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늘 불신앙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임마누엘은 곧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함께 하셔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유대인 소녀가 독일 경찰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미 독일 경찰에 의해 붙잡혀 끌려갔습니다.
이 소녀는 왈소라고 하는 곳으로 도망하여 산 속에 숨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신학자 요하네스 교수가 그 산속에서 한 가지 메모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메모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첫째, 나는 지금 빛나는 태양을 보지 못하나 밖에는 찬란한 태양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둘째, 이런 험악한 세상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셋째, 지금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고 계시나 지금 이 산속에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
우리에게 바로 이런 임마누앨의 신앙이 필요하다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다면 여러분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눅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 부분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여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게스트하우스나 객점을 뜻하는 카탈루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근데 이 단어는 전통적으로 여관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가정에 손님이 묵는 방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베들레헴 마을에 그 어느것도 예수님께 자신의 방을 내어드릴 만한 그런 마음들이 없었다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어쩌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라고 마리아와 요셉이 두드렸던 누군가의 집이 우리집의 방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천년 전 우리가 베들레헴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놓쳤을까?
그런데 이런 질문은 올바르지 않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물어봐야 할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목회의 그 여정 가운데 제가 가장 중요한 절정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많은 이들이 짐을 짊어지고 가야 될 순간에 해당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때에는 아무도 그 순간에 없었다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아주 결정적으로 뭔가 행해야 될 순간에 참 고독했다라는 이야기
그 고독감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 정말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여러분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외롭고 여러분은 고독합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나의 인생 가운데 바로 세우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여러분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말은 히브리어를 임마누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떠나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 모든 형편과 모든 사정을 아십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함께 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그러 하십니다.
존 웨슬리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성탄절은 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성탄절이라고 이야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제 버리시지도 아니하시고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지금부터 영혼까지 함께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그 예수님을 이 성탄절에 만나서
그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제 인생의 길을 새롭게 걷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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