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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관한 묵상, 마태복음 14:15-21 윈도우 XP 익스플로러8 에서는 지원이 되지 않습니다. 윈도우7 이상 지원됩니다. 윈 XP 환경에선 구글크롬(Chrome)을 설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원가능 환경 : WINDOWS7 이상(익스플로러9이상), 크롬, 사파리
설교말씀을 mp3로 듣기 쉽지 않은 상황의 지체들을 위해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최대한 정리하여 싣습니다.^^ ----------
일시 : 2023년 11월 26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본문 : 마태복음 14:15-21
설교제목 : 밥에 관한 묵상 (김상현 권사)
[마14:15-21]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여러분 반갑습니다.
옆의 분, 앞 뒤로 인사를 나누시죠. 반갑습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옛날 시계는 매일 태엽을 감아주었습니다.
태엽을 감아주지 않으면 시계가 멈췄습니다.
어른들은 외출할 때면, “애야 시계밥을 줘라” 하고 외출하셨습니다.
태엽감는 일을 밥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시계를 밥을 주지 않으면 죽었습니다.
예전사람들의 인사도 지금하고는 달랐습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또는 “밥먹었니?” 라고 인사를 나눴습니다.
이 말 속에는 밥을 굶지 않고 건재하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곤핍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밥 먹었느냐?” 하는 인사는 서로를 격려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일용할 양식인 밥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밥이란 무엇인가?
밥이란 무엇일까요?
밥은 따로 있으면 명사죠.
밥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밥은 항상 ‘먹는다’라는 동사를 통해서 행동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밥은 생명을 연결하는 원초적 요소입니다.
생명의 활동은 지속적으로 밥을 먹는 행위인데
우리는 이걸 생존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모든 생명의 첫 행동은 밥을 먹는 것이며
모든 생명의 마지막 행동은 밥술을 놓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모든 포유류 동물을 보면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기도 전에 어미의 젖꼭지를 찬습니다.
사람이 제수명을 다하고 돌아가실 때는 곡기를 끊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타자를 존재로 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렵게 들리십니까?
내 존재는 내 몸 속에 있는 수많은 타자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었던 우리 아침의 식단은 한때는 우리와 같은 생명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무슨 식사를 하셨습니까?
거기에는 싱싱한 채소, 쌀, 또 여러가지 반찬이 있지요.
이런 것도 우리 식탁에 오르기 전에는 생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밥이라는 물질 외에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또 신의 형상답게 지탱해 주는 정신, 영혼에 필요한 양식이 있습니다. 근데 이것도 밥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즐거움, 기쁨, 사랑, 희망, 평화 이런 긍정적 요소들이 있는가 하면
시련과 괴로움, 슬픔 같은 부정적 요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 요소조차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들인데
모두가 우리를 존재케 하는 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권사님이 읽으신 마태복음 14장 말씀이지요.
14장 15~21절 말씀
그 본문에 보면, 우리 말로 풀어서 이야기하면
밥 다섯 덩이와 물고기 반찬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고 열두광주리가 남았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건을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서 굷주린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말씀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빈들에 모인 군중들은 하루 세 끼의 밥, 곧 물질이 필요했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어도 이들은 하루 세끼의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예수님 있는 곳, 그 빈 들에 모여들었을까요?
디베댜에서, 갈릴리의 수도 세프리스에서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대한 과도한 세금과 지배자들의 폭정과 율법의 얽매임으로 인해 숨조차 쉴 수없는 그러한 희망없는 현실, 그 막막함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가 듣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주리고 목말랐습니다.
그들에겐 목마름을 적셔줄 생명의 양식이 절실했습니다.
그들은 청년 예수가 무엇이라 말하는가 귀를 열고 들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자, 그 때 이렇게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빈 들에 수많은 몇 천명의 군중이 모여 있는데
그 시대에는 좋은 오디오, 마이크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저 뒤에 있는 군중들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제자들이 그 뒤의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래”
그 무리가 또 뒤에 있는 무리에게 전달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래”
그렇게 해서 저 끝에까지 주의 말씀이 전달되었습니다.
오천명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구나.
그 순간 그들의 마음에 어둠이 걷히고 비로소 환한 빛이 비췄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다시 맨 앞줄에 있는 제자들이 뒤에 있는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소금이래.”
그러자 그 제자들 뒤의 무리가 그 뒤 무리에게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래” 이렇게 또 말했습니다.
오천명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구나.”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 사람이 떡이라든지 밥이라는 물질로만 사는 게 아니구나.”
영의 양식을 갈구하면서 그 마음에 “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구나.”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그릇 안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지 않습니까?
그리고 온 집안을 비추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착한 행실로 세상을 밝히십시요.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또 여러분은 소금으로 사십시요.
소금이 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습니까?
소금으로 살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밟혀 버려진 신세가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빈 들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말씀을 나누는 이 기적은
빈 들의 마른 풀 같은 심령을 가득 적시고 채웠습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인에게 예수가 일용할 양식인 밥입니다.
2천년 전에 갈급했던 군중들처럼
지금 우리가 예수로 갈급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영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인에게 일용할 양식인 밥입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려 스스로 인류에게 구원의 밥이 되셨습니다.
그러려면 에수를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찬송가 286장애 보시면
주 예수님 내맘에 오사 날 불들어 주소서.
내 마음에 새힘을 주사 늘 기쁘게 하소서.
사랑의 주 내 마음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우리의 상한 맘 고치시는 분은 주예수님 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우리는 타인에게 넉넉한 밥이 되어야 합니다.
밥은 그것을 먹는 이의 몸을 만들고 정신을 만듭니다.
어떤 밥을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미래가 열리거나 닫히게 됩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밥은 생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생명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선한 밥이 되라’ 이런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싸울 때에 어떤 사람들은 막 머리를 들이밀면서
“내가 네 밥이냐” 이렇게 말하면서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밥이 된다면 그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여기에 시 한 편을 제가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이 시는 ‘밥1’이라는 제가 발표한 시인데요.
시니까 들어있는 여러 가지 거미가 나오고 나방이 나오는데
곰곰하게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밥1 (김상현 시)
바람 꽁무니 도사린 후미진 곳,
거미줄에 걸린 늙은 나방이 거미에게 말했습니다.
기꺼이 나를 먹으소서
나는 허기진 당신의 먹이로소이다.
나로 한 끼의 배부름을 채우고도 남는다면
한적할 때 당신이 즐길 간식거리로 매달아 두소서.
흔적도 없이 남김없이 당신의 밥이 되어도
당신으로 인해 나의 최후는 넉넉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나방은 은빛 줄에 앉아 처음으로
날아온 하늘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비로소 하늘이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시에서처럼
밥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 봤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시에서 보면 나방이 거미줄에 걸려서 살아나려고 파닥거리고 날아가지 않고 말했습니다.
“기꺼이 먹으소서.”
우리의 삶이 이래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는 당신의 밥이 되어도 당신으로 인해 나의 최후가 넉넉하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온 삶이 매우 만족하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세상이 각박하고 처절한 것은
남의 밥을 빼앗아 먹으려는 데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양 99마리가 있는 자가 양 1마리 가진 자에게 양을 빼앗아
100마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권력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밥을 빼앗고
넉넉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의 밥을 빼앗으려 전쟁을 하는 비열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무슨 평화가 있겠습니까?
지금 세계는 물 한 동이를 얻게 위해 10리를 걷고
땔감으로 쓸 소똥을 줍기 위해 5리를 걷고
굶주려 영향실조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비만을 빼기 위해 조깅을 하는 비열한 현실을.. 그러한 현실에서 살고 있습나다.
이런 불평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2천년전 오병이어의 나눔 정신
그 예수 정신이 기독교의 중심사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사상, 예수의 정신은 나눔입니다.
예수는 2천년 동안 꾸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요.
걷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주십시요.
오리를 가가고 하면 십리를 가 주십시요.”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일, 순종하는 일, 협력하는 일, 나누는 일, 베푸는 일 모두 내가 밥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밥이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세상을 아름다운 밥으로 살다간 한 사람을 제가 소개하고자 합니다
목포에 가면 박길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앞에 화면에 보시는 ‘멜라콩 다리’라는 이 비석은
박길수라는 사람이..
그 분은 제가 어렸을 때에 목포역에서 가서 보면 1급 장애자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가만있어도 눈이 돌아가고 온 얼굴이 비틀어지고
그리고 움직일 때는 온 몸이 뒤틀리고
그런 몸으로 목포역에서 수화물을 나르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별명이 ‘멜라콩’이에요
이 분이 1928년생입니다. 일제때에 산 분입니다.
일제시대 때 영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보스럽게 몸이 뒤틀린 그러한 지체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사람이 멜라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길수라는 사람의 별명이 멜라콩이었습니다.
우리는 박길수라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그냥 그 사람을 멜라콩이라고 부르고 저 사람이 멜라콩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수화물을 날라서 아주 서럽게 번 돈으로 뭘 했느냐 하면
거기 목포역에는 지금은 복개를 했지만 옛날에는 개천이 빙 둘러서 흘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개천 반대편에 있는 똥섬이라는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 아주 비천한 사람들 막노동꾼 또 그물 깁는 사람들, 술집작부
이런 사람들이 그냥 천대받고 버려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예요
그 사람들이 목포역에 오려면 빙 돌아서 와야 합니다.
그래서 다리가 필요한데 시장도, 국회의원도 아무도 다리를 놔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멜라콩 박길수씨가 자기가 평생 모은 돈으로 거기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리의 이름이 멜라콩다리입니다.
그리고 보셨던 그 비석은 복개하고 그 때 멜라콩 다리의 표석, 지금 목포역에 가면 담에 붙여져 있습니다. 목포에 가시면 꼭 찾아서 보시면 좋은 교훈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아름답게 세상을 산. 그러한 아름다운 밥이 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이제, 시골에 살았는데, 어렸을 때 배골이 하던 시절이죠.
가난하고 다 배고팠던 시절이죠
그 때는 밥도둑이 있었습니다.
집에 가만히 부엌에 와서 밥을 훔쳐 먹고 가는 밥도둑인데요.
어머니는 늘 가마솥에 밥도둑을 위해서 밥 한 그릇을 고봉으로 담아서 넣어 두셨습니다.
밥도둑은 밥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알아차렸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가마솥에는 여전히 밥 한그릇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밥도둑은 그 고마움의 표시로 아궁이 옆에다 나무단을 한짐 가득 부려 놓고 갔습니다.
그 뒤로 한 번도 밥도둑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침마다 가마솥에 그대로 남아있는 밥 한 그릇을 보며
어머니는 “어디가서 굶어죽지 않았나”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이 밥도둑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밥 도둑이 도둑같지 않잖아요?
가마솥에 넣어둔 밥을 먹고 고마워서 부엌 한 쪽에다가 나뭇단을 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것 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나뭇단을 부려 놓고 가서 그 다음에 오지 않았다.
밥도둑도 은혜를 알죠.
하물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서,
은혜를 망각하고 산다면 무슨 우리 삶에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밥을 먹을 때마다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밥 한그릇을 받으면 하늘을 섬기듯이 감사하고
땅에 입맞춤하고 밥풀 한톨 한톨이 내 살이거니 믿으며
농부를 향해 절을 하며 빌면서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밥 한그릇보다 더 큰 은혜 없다는 마음으로 밥을 먹을 때
우리 마음에 감사로 넘치게 됩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이기적인 기도를 하지 마십시요.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햇빛과 바람을 주셔서 이 곡식을 익히시고
농부의 피땀어린 손길을 통해서 이 식탁까지 제공되었으니
그 농부를 축복해주시기를 빌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밥을 먹을 때마다 타인에 대한 감사가 넘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려냐 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무수한 생명의 밥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생명처럼 죽어서 밥이 될 수 없지만
그런 마음으로 타인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슬픈 자를 위로하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외로운 자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밥이 되는 삶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이제 인사를 다시 한번 나누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들에게 “밥이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를 나누시죠.
다시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제가 밥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이
진정한 밥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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