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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통해 지체 한 분 한 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머물기를 바라며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정성껏 정리하여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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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3월 1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 본문 : 베드로후서 1:5-7
설교 제목 : 함께 지어가는 사람들
[벧후1:5-7]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오늘은 삼일절 10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삼일절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강한 힘이 인간을 억누른다 할지라도
자유를 향한 인간의 꿈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제시해주는 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날이 겨울과 봄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그것이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일어서는 풀들을 여러분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명의 힘이 참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누르는 힘이 강할수록 솟아오르는 힘도 커진다는 것
생명이라는 것은 일어섬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한가 저는 성찰해 봅니다.
우리도 예수혼에 사로잡혀서 일어서는 그러한 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라고 희망을 해 봅니다.
미국에서 일어났던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한 운동선수가 운동을 하다가 그만 크게 다쳐서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달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가족 중에 일곱 살 난 어린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이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애원을 합니다.
우리 형은 얼마나 훌륭한 운동선수인지 모릅니다.
다리가 꼭 필요합니다. 선생님 제 다리를 잘라서 형에게 붙여 주세요.
형이 운동할 수 있는 장면을 제가 늘 보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며 애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 이야기가 세상 속에 전파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33편 1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기자는 인생의 행복이 어디 있느냐라는 것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그곳에 행복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억만금을 쌓아놓고도 서로 아옹다옹 싸운다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쌓아야 할 덕목 중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와 사랑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그저 믿습니다, 하고 끝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덕 위에 지식을 쌓고 절제와 인내를 훈련하고 경건생활로 마음을 다져야 합니다.
그 뒤에 형제들과 함께 사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형제애, 언어로 필라델피아 라는 헬라어인데 사랑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목회 여정 가운데에서 느끼는 게 뭐냐?
아무리 좋은 형제애라 할지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형제애는 너무나 쉽게 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디다스, 푸마의 일화입니다.
독일의 루돌프와 아돌프 형제는 함께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을 하면서 성격 차이, 여러 가지 부분에서 마찰을 일으킨 결과
결국에는 함께 하지 못하고 서로 나가서 독립된 공장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을 때까지 화합하지 못하고
결국 죽는 그날까지 서로의 관계를 단절하고 어눌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두 형제의 경쟁심이 신발에 대한 특별한 집념 가운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세계적인 신발로 비약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가족 간의 화해 없는 성공은 쓸쓸함만 보여줍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꼭 묻고 싶어요. 도대체 신앙이 뭡니까?
여러분이 예수 잘 믿는다는 게 뭡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형제애가 무엇입니까?
본래 이스라엘은 야곱의 핏줄을 이어받은 한 형제의 나라였습니다.
야곱이 죽은 이후에 열두 지파로 공동체가 세워졌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 가족의 후손들이 이룬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사사기를 읽어 보십시오. 지파 간에 얼마나 경쟁하고 서로 죽이고
고통스러운 전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다윗 시대에 와서 모든 지파가 하나로 통일되는 통일 국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열두 지파가 함께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뒤에 하나님 앞에 다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이 감격해서 외친 노래가 바로 시편 133편인 것입니다.
[시133:1-3]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아론이 누구입니까? 아론은 제사장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중요한 것은 중보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에 보면 여러분들이 머리에서 수염에 이르기까지 보배로운 기름이라는
그러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수염까지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기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하여서 흐르는 말씀과 축복과 삶의 모든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형제가 연합할 때 제사장을 통해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온갖 축복이 그들 가운데 흘러내린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공동체가 서로 한 몸을 이루어 한 몸된 삶을 이루어가지 못할 때
결국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흐름이 단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핏줄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강조점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의 공동체를 그들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것, 큰 나라 아닙니다. 잘 사는 나라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오직 한 가지 열망이 있다면
믿음의 나라 안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궁극적인 행복을 소망했던 사람들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시는 영생의 복을 누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혈육 중심이 아니라 신앙 중심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나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 중심으로 모일 때에는 열두 지파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 신앙의 길 안에서도 다른 부분을 덮어주고 용납하며
하나님의 율법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서로 양보하며 그 가운데 사랑을 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무너지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결국은 핏줄을 따지기 시작하고 핏줄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여지없이 서로 다투고 분열된 현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여러분,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될 때에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넘볼 나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분쟁하고 싸울 때에는 세상 속에서 가장 나약한 모습을 지닌 지체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서로 인간적인 조건을 따지기 시작하면
즉 고향이 어디냐?
그래서 어느 교회는 기억합니다만 전라도 분들이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곳은 전라도 분이 아니면 일원이 되기 어렵습니다.
또 재산이 얼마냐?
그 재산에 따라서 교회의 그룹들이 나눠져 있는 형태의 모습을 가진 교회도 있습니다.
또 학벌이 어떠하느냐?
심지어 시골에 가서 성씨를 따지는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 공동체는 오합지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 속에서 날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더 나아가서 절망감을 안겨주는 공동체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시는 말씀과 은혜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거룩한 하나님의 지체들이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바로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 가운데 반성하는 게 있습니다. 제 잘못이 참 많습니다.
제가 반성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가 42년의 역사를 지내오면서
분열만 하지 않았더라면 다투지만 않았더라면
이 공동체가 지금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치와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큰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교적부를 제가 한번 점검을 해봤습니다.
목회의 그 여정 가운데 참 아팠습니다.
성도들의 이름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교적부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여 명이 넘습니다.
뭔가 그리스도의 가치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의미를 이 땅에 실현해 나갈 귀중한 시간 속에서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아픔을 겪으면서 나약한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들
아~, 우리가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했구나. 그러면서 우리는 뭘 기대할 수 있을까?
반석동에 오면서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면서
정말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를 다 이해하면서
함께 살아가자는 새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반석동에서도 여전히 또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서 지금은 이제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고 그리스도 마음을 품고
그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며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오늘의 모습 속에서
저는 내일의 고백교회의 비전을 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의 흐름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보는 관점, 생각하는 관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우리가 나아갈 때
우리는 각기 다른 모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희생과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목회를 잘 한다?
여러분과 매일 다 똑같습니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지요.
제가 이 자리에서 오늘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씀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제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거하셔서 저를 받아주고
저를 품어주는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여러분, 참된 형제애라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참된 형제애는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을 보면
우상 제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이는 귀신에게 바친 제물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서는 그건 음식에 불과하다. 왜 그렇게 연약한 믿음을 갖고 있느냐?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먹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때 사도바울이 제일 먼저 고린도전서 8장 1절 말씀 속에 던지는 교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은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린도전서 8:1)
이해가 되십니까?
지식이 많은 사람들,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아쉬운 게 그거예요.
사실 우리 교회는 처음 초창기 때부터 보면 엘리트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연구소, 특별히 박사들이 참 많았습니다.
충대 약학대학장도 있었습니다. 뭐 헤아릴 수 없어요.
그들은 늘 지식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빈곤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뭐냐라고 이야기할 때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영향력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지식이 많다고 누가 봐도 다 알고 있는데
그분이 강조합니다. 이건 아니라고
그럼 다른 성도들은 그냥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지요.
고린도전서 8:13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네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린도전서 8:13)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여러분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이 뭐냐?
형제를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
옳고 그름은 지식의 문제이고 형제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은 사랑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법정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히려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형제애가 무엇입니까?
허물과 잘못을 고치도록 돕는 정죄보다는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실수하는지 몰라요.
오늘 오창연 장로님의 예전에 오후예배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받아주시는 것 같은데
실상은 자기 고집이 아주 강한 사람이다.
오장로님 맞습니까? 틀려요?
목회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옳고 그름을 가지고 자꾸 정죄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한 영혼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내가 좀 아파도 내가 좀 힘들어도
여러분을 이 공동체 안에서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괜찮다.
뭔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살리는 게 목회 아닙니까?
그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왜 그렇게 한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를 좌절시키고 절망감에 빠뜨립니까?
저는 여러분의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 영혼을 위해서 세우심을 받은, 아니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너무나 많이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형제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10:12
이 말씀 꼭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언 10:12)
꼭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참된 행복은 용서와 화해에서 비롯됩니다.
부부, 부모 자식 간, 형제 자매, 성도와 성도 등
모든 관계에서 용서 없이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꼭 부탁하고 싶어요.
어떤 사람이 아픔을 겪고 자기의 뜻에 거슬리고 맞지 않는다고 할 때
그를 제발 정죄하지 마세요. 역지사지로 그의 입장에 들어가 보세요.
그 사람이 얼마나 아팠으면 그 사람이 고통스러웠으면 저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래서 그의 빈 부분을 여러분이 채워주시고 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사랑 아닙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함부로 누구를 질타하고.. 그러면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가운데 위대한 인물 요셉을 기억합니다.
형제들의 미움에 의해서 팔려 나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종살이를 하고 옥살이를 하고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맺혔습니까?
국무총리가 된 다음에 형들을 만났을 때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을 조건 없이 용서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형들의 아들 딸 조카들을 다 책임을 지겠노라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그런 공동체를 구상해 보십시요.
세상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요셉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은 용서와 화해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에 빠진 우리 사이에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화목제물이 되신 분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이제 그러기에 마지막 화면을 보시고 함께 읽음으로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지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그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축복된 가족'입니다.
확신하십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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