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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통해 지체 한 분 한 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머물기를 바라며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정성껏 정리하여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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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4월 19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 본문 : 히브리서 3:1
설교 제목 : 예수를 깊이 묵상하라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오늘은 불의의 역사에 맞서 정의를 외친 4.19 60주년 날입니다.
요한복음서에 보면 참된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어둠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비추는 등불로 세상을 살아가야 됨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4.19 기념일을 맞아서 여러분 삶 속에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희망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프랑스의 대문호인 빅토르 위고가 종종 아무것도 아닌 사물 앞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왜 쓸모없는 것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가?
녹슬고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를 한참 묵상하는 그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지켜보면서 어느 날 묻습니다.
당신은 왜 쓰레기 더미 같은 것을 보고 있습니까?
휴고는 그때 그 사람들을 향하여서 나는 그 고철더미 속에서 변화와 부활을 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고물이라고 하지만 묵상하는 자는 그 안에 숨겨진 가득한 가능성을 봅니다.
녹을 닦아내고 고철을 불 속에 집어넣으면 온 세상을 지탱하는 철기둥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조각상도 만들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묵상이란 겉모습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부족한 죄인이다.
겉모습만 바라보면서 그렇게 판단하지만
사실은 우리 속에 담겨 있는 소중한 가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묵상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특히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오늘 성경본문에는 사도요 그리고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래 사도라는 것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냄을 받은 예수님이 왜 우리 곁에 오셨는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그분이 치르신 희생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이 보이신 겸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이 참으신 인내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
여러분들 보면 들어오면서 또 성경을 열심히 읽는 분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앙이라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단순한 지식은 머리로 깨우칠 수 있지만 참된 진리는 가슴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가운 이성만으로는 진실을 볼 수가 없습니다.
가슴으로 와닿아야 합니다.
제가 요즘 눈물이 많습니다. 왜 나는 이 때에 눈물이 많은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거기에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전에는 성도를 머리로만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지금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슴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찬송을 부를 때에도 눈물을 짓는 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느껴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십자가, 여러분 어떻게 보입니까?
여러분, 십자가는 강대상에 달아 놓은 하나의 표지가 아니라
내 가슴 속에 부딪혀 오는 사랑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딸이 되고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포스톨로스라고 하는 말에는 또 다른 두 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아포스라는 말과 스톨론이라는 말이 합성된 말인데
그 중에 스톨론이라는 말은 생물학자들에게 아주 익숙한 단어로 식물의 뿌리,
그 중에서 새로운 신종 생명체를 생산해 낼 수 있는 뿌리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오셔서 죄인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직접 겪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장 깨끗한 제물이 되시는 동시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구약 성서에서는 매번 제사를 드릴 때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단 한 번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어느 자리에,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희망 없는 삶을 살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내일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그분의 크신 사랑을 받는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속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사실은 어떤 측면 속에서 우리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예배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선배들은 단순히 규칙을 지키고 의식을 치르는 그런 종교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앙이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동행하시는 하나님
그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모습 속에 이것이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이 지금 내 삶에 내 곁에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왜 예배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까?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야기를 잘 분석해 보십시오.
그들이 찬양하고 예배를 드렸던 이유 단 한 가지입니다.
의식이 아니라 의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의 감격 속에서 죽음을 감수하면서 그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할 사람도 용서했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신분, 인종, 국적의 장벽을 허문 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모든 교우들이 진심으로 한 형제 자매가 되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이 가끔 이렇게 질문합니다.
목사님, 제가 무얼 해야 할까요?
여기 계신 분들 기억나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단지 예수님 안에만 머무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걷는 것, 교회에서 봉사하기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신앙이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초대교인의 봉사, 물론 우리 교회는 해당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많은 교우들이 교회 안에서 봉사를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성가대를 바라보면서 남자 자리가 많이 비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좀 저기 지원해서 같이 하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이라는것은 눈치 볼 일도 없고 또 칭찬 때문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사랑에 감격했던 사람들이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주를 위해서 목숨을 던져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 번 들은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의 폴리캅 기억하실 거예요.
박해가 심했던 그 시절에 네가 만약에 예수를 부인한다면 너의 생명을 건져주겠다 라고
그때 폴리캅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한 평생 그분을 섬겼지만 그분이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거늘
어찌하여 내가 내 안에 계신 나의 주를 욕할 수가 있겠습니까?
순교자였던 사볼리콜라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나를 죽일 수 있겠지만
살아있는 내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서 떼어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롬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게 우리가 고백해야 될 말이 아닙니까?
여러분, 엊그저께 한 분이 전화를 했어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저한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목사님!, 왜 그러느냐?
제가 늘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직은 예수님보다는 목사님이 좋아서...
목사님 보고 싶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제게 좋게 들리는 말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사실 허물도 많고 죄도 많습니다.
당신이 바라봐야 될 것은 예수님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시험당하신 예수님처럼 시험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예수님을 모른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여러분은 신앙의 첫걸음도 아직 내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예수님 나에게 어떤 분인가?
그 의미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5장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문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음 속에 계신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고
그 중심 속에 계시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의 자리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삶의 모습이 얼마나 착하냐 그게 아닙니다.
얼마나 진실하냐 그것도 아닙니다.
착하고 진실한 것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을까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을 정돈할 수 있는 모습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18세기에 독일 경건주의 운동 지도자였던 진젠도로프 백작의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귀족이자 유능한 공직자였던 그는 어느 날 미술관에 방문해서 예수님의 그림을 발견하고 그 앞에서 무너집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그 그림 밑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이 물음이 그의 인생 전체의 삶을 송두리채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진젠도르프는 명예와 재산 이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박해받는 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인 그 곳에 해론후트라는 주님의 보호하심이라는 이름인데 공동체를 세우고
이후에 공동체의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선교를 따나게 되었는데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자 소유주들이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모여서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때 그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예가 되겠습니다.
두 사람이 노예가 되어서 아프리카 노예들을 향하여 들어가려고 결단합니다.
그들이 항구에서 떠나는 날 그들을 보내는 모든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노예가 되기 위해서 그들의 모습, 그것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도 42년 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해 왔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뜻하신 위대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고백공동체 지체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 가운데 되돌아보면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삶의 안락과 축복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이 뭐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베푸신 떡에만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꾸 떡 떡 떡하는 건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아래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같이 길을 걷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유를 버리고 스스로 노예가 되었던 선교사의 뒷모습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주신 축복에 환호하지만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은 머뭇거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웃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울 수 있는 모습이 있어야 된다는 것 그것을 꼭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걸어가신 사랑과 희생의 좁은 길을 바라보십시오.
그 길 끝에 진짜 생명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창한 선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진심 어린 마음으로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그 말은 바로 나를 위해 전부를 주신 주님 저도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 한 마디의 고백을 예수님께 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 이러한 삶은 여러분 가장 중요한 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는 자만이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말씀 다 잊어도 좋습니다.
단 한 가지, 예수님을 만나야 산다는 것
그래서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또는 십자가를 늘 묵상하는 삶이 여러분이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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