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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통해 지체 한 분 한 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머물기를 바라며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정성껏 정리하여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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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4월 26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 본문 : 마가복음 10:46-52
설교 제목 :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세계가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이 희망과 절망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아이들과 희생자들을 주님이 품어주시기를 빌어봅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인생이란 뜬구름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죽음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임을 잊지 말고
삶의 자리 속에서 생명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빌어봅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가
어느 날 숲속을 한 시간 동안 산책하고 온 친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때 그 친구가 대답하기를 나는 특별한 걸 본 게 없습니다.
헬렌 켈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한 시간 동안 숲속을 걸으면서 특별한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후에 자신의 수필,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력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적게 본다.
난 단지 손가락 끝의 촉감만으로도 나무의 정교함, 자작나무의 매끄러움, 소나무의 거친 질감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만약에 대학총장이 된다면 나는 보는 학과를 개설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한다는 사실
이것이 가장 불행한 삶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한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정작 비극적인 것은 버젓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귀가 병이 들어서 못 듣는 것,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비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대해서 마음 문을 닫고 강퍅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진리를 보고 깨닫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듣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한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이 불행한 사람이 눈을 뜨는 엄청난 기적, 메시아적 기적의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바리새인들은 눈이 열리지 않아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점잖게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내가 온 것은 스스로 본다 하면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들의 소경됨을 드러내며
스스로 소경이라 절망하면서도
실상은 진리를 깨닫는 이들이 결코 소경이 아님을 깨우쳐주러 왔노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눈치 빠른 바리새인들은 화를 냅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소경이란 말입니까?
그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죄가 없었거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 이하에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실제는 가난한데 부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죄
벌거벗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죄
그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착각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착각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옛날 어느 한 저택의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습니다.
그 정원에는 수백 년 된 늙은 느티나무가 있고
그 옆에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가목이 서 있었습니다.
느티나무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모습이 아름답지가 않습니다.
주인은 늘 느티나무를 흉물 취급하면서
항상 비단으로 만들어진 조화나무를 감상하면서
이 나무가 좋다고 그 나무를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폭풍우가 내리쳤습니다.
그 다음날 보니 비단으로 만들어진 가목은 다 쓰러져 버리고
느티나무만 거센 바람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뚫린 구멍 속으로 그 바람을 다 내어 보내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느티나무는 겉치장 대신에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렸지만
비단나무는 화려함에만 치중했을 뿐 시련을 이겨낼만한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바로 완벽하게 보였던 가목, 가짜나무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여러분,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착각합니까? 사람들이 왜 진실을 보지 못합니까?
무언가에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욕심이나 미움이나 거짓이 눈을 가리면 진실을 바로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미움의 눈을 갖고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아무리 바라봐도 그 사람에게서 착한 이면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활하고 더 악한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거짓의 눈으로 보면 세상의 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성도들에게 듣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 사람은 진상인데
목사님은 여전히 받아주고 또 그 사람을 향하여서 애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며 어떻게 걸어가십니까?
여러분,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진실이 보인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합니다.
혹시 교회 안에서 간혹 아픔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가장 귀중한 생명,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 사람을 사랑의 관점 속에서 보게 됩니다.
그때 나타나는 것이 뭐냐,
저 사람이 이런 삶의 여정을 겪다 보니까 저런 모습을 지니게 되었구나.
저 사람이 성장해가면서 이런 아픔을 겪게 되다 보니까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되었구나.
그 사람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봅니까?
어떤 눈으로 사람을 대하십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앞을 못 보는 거지 바디매오의 애절한 외침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그때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눈을 떠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이런 애절함, 간절한 외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마음의 눈, 귀를 가리고 있는
탐욕, 시기, 미움, 억울함, 그리고 편견이라고 하는 낡은 덮개를 벗어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이라는 것은 사랑의 눈으로 볼 때 보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들었던 예화입니다.
한 초등학교에 톰슨이라는 선생님이 부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반 아이 가운데 테디라고 하는 아이는 모습이 너무 지저분하고 초라해서
톰슨 선생은 저 아이는 불량한 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었을 때 그 아이가 선생님에게 과자를 먹던 봉지에 싸여 있는 목걸이와 그리고 향수를 담아서 선물로 드립니다.
톰슨 선생은 그것을 받아들고 아이들은 비웃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참 향수가 좋다. 목걸이가 아릅답다.
그러자 테디라고 하는 아이가 선생님에게 다가와서
선생님, 선생님의 몸에서 엄마 냄새가 납니다.
그때 톰슨 선생은 깊이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지금 세상을 일찍 어머니를 그리워하는구나.
그 아이의 마음 속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슬픔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 선생은 지식이 아닌 사랑을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훗날 훌륭한 의사가 된 테디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어머니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법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디가 마침내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이 초라한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슬픈 진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외쳐야 합니다.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내 안에 있는 편견을 걷어내고 사랑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제가 요즘 늘 강조합니다. 딱 한 가지만 기억해달라고. 다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진실이 보인다.
이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옆사람에게 이야기해 볼까요
사랑의 눈으로 보면 진실이 보입니다 하고 옆사람 쳐다보세요.
여러분,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에 나왔던 김홍태라는 분이 오늘 아침 일찍 나와서 예배당에 도착했습니다.
어쩐 일이냐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이야기가 목사님, 저는 오늘 11시 예배를 못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일찍 나와서 먼저 하나님 안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성가대 연습실에서 혼자 거기에서 노트북을 열어놓고
여러가지 작업을 하면서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지난 주에 나왔는데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그분과 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끼는 것이
아하, 그분 안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그 인생의 모습을 움직이게 했다는 것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목사님 이제 저의 인생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제가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저를 불러 주십시오.
저는 그 사람과의 이야기를 통해 느낀 것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눈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볼 수 있구나.
그걸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형식적인 교회 생활을 끝내고
여러분이 길을 걷든지 가정 안에 머물러 있든지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저는 여러분의 영적 눈이 밝게 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한 사람이 꼭 되시기를 기도하며 부탁을 드립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라는 것
그 한 가지 꼭 담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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