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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통해 지체 한 분 한 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머물기를 바라며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정성껏 정리하여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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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5월 31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 본문 : 누가복음 23:22-25
설교 제목 :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사람
설교 실황 :
[눅23:22-25]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제가 2주 만에 이제 돌아오니까 성도들이 만날 때마다 하시는 인사가 잘 쉬셨습니까? 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그 휴가의 시간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쉼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저에게는 여러분이 삶의 자리 가운데에서 평안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오늘의 삶을 웃음짓고 살아갈 때
그게 나의 쉼이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몸만 떠나 있다고 그게 쉼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공동체 안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신음한다면
어느 곳에 있든지 아픔이 된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 여러분 삶이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삶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은총의 기쁨을 가지고
날마다 행복을 자아내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한 사람이 되시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그런 한 사람이 꼭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삼성 노조의 성과금 논란으로 인해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고 있는 화려한 성공의 길의 끝은 결국은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을 갖고 그 가치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특히 스스로 이룬 성취에 도취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재물이 늘어서 타인을 교만하게 대하거나 그 부유함은 결국은 화가 되고
지위가 높아져서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성공은 실패가 될 것입니다.
[잠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말씀 기억하십시오.
항상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존중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우리 고백공동체의 한 사람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1936년 6월 13일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군함 진수식이 있을 때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시대는 히틀러 시대였습니다.그 곳에서 히틀러식 경례를 거부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자 모든 사람들이 한 오른손을 쳐들고 히틀러식 경례를 하며 그 모습이 파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 군중들의 사진 속에서 한 사람이 팔짱을 끼고 묵묵히 침묵하고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우구스트 랜드매사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유대인 여인을 사랑했고
인종차별이라는 법에 가로막혀서 결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이 유대인을 적으로 규정할 때 그는 사랑은 죄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개인의 진실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직장과 사회에서 다수의 논리에 접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아우구스트의 팔짱을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수를 따르는 것이 편안할 수는 있지만 자기를 속이지 않는 소신이야말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장 고귀한 가치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본문 22절에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라고 시작이 되는데
그가 이전에도 두 번씩이나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옳다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한 순간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눅23: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큰 소리 앞에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진리, 가치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의 기준은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이 왜 다수를 따르려고 합니까?
다수의 편에 서야 자기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빌라도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 다수의 편을 선택했지만
그는 이미 다수 편에 서는 순간 권력도 권위도 다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힘이 없는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생각과 참 다른 것 같습니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더 나아가서
[빌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세상의 권력을 탐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중의 인기를 신경쓰지 않는 사람만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솔직히 들여다보면
제가 느끼는 것은 우리는 늘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를 정말 인정해주고 있는가?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욕구를 여러분들이 버린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제가 요즘 목회하면서 느끼는 게 그렇습니다.
오늘의 목회상황 속에서 여러분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그것 신경쓰지 않습니다.
제가 목회 초기에는 사람을 신경쓰면서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목회의 시간이 흐를수록 빨리 지쳐버리는 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벗어버리니까 이제 정말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아, 이게 자유구나 라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
1964년 피아니스트 글랜굴드라고 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가 공연을 할 때마다 항상 공연은 매진이 되었고 대중들은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천재적인 연주에 열광을 합니다.
하지만 굴드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천 명의 관객이 가득 찬 공연장에서 연주를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음악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검투사처럼 관객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가?
관객들은 그의 음악을 듣기보다는 그가 오늘 보여줄 음악 가운데 나타날 제스처나 그 모습들을 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굴드는 자신의 진정한 음악이 그들과 소통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결단을 하고 은퇴 선언을 합니다.
글랜 굴드는 은퇴 후에 죽을 때까지 대중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음반들은 오늘날까지 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자유롭고 혁신적인 연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권력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 얻는 것이 권위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권력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권위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권위를 갖는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제가 느끼는 이야기입니다.
목회 42년 동안 수많은 장로님들을 세웠습니다.
장로님들은 세워서 교회를 운영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장로님을 세운 은혜의 기쁨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정말 저분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그렇게 감동을 주고 느낌을 주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걸 보면서 느끼는 게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장로라는 위치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정말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구나.
그런 측면 속에서 오늘 우리 공동체 안에 세워진 장로님들은 마음 속에 기억하며 산다는 것. 왜 그렇습니까?
권력을 탐하지 않기 때문에 늘 어떻게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낮은 자리에서 마음을 다하여서 삶을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는 자세가 배어 있는 장로님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남북전쟁의 명장은 로버트 리 장군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겸손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진흙탕에 수레가 빠져서 병사들이 수레를 끄집어 내고자 노력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장군은 말에서 내려서 그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수레를 밀어냈습니다.
나중에 그 노신사가 총사령관임을 알게 된 병사는
군림하는 대신 고난을 함께 나누는 진정한 리더의 권위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전쟁을 끝난 후에 그 사람에게 어떤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적장인 그랜트 장군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나는 적장인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 길을 걸어가는 한 사람이 되기를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제 마음 속에 누군가 미워할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비난을 잠재우는 것은 더 큰 비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실천한 그의 침묵과
깊은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가는 가장 명확한 답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마태복음 12장 33절에 우리가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고대에서 소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음식을 썪지 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된다는 것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부패적인 그 모든 요소를 막아내도록
그들의 자리 가운데 스며드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룩의 역할이 반죽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이젠 부패방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는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민감성,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꼭 살아가십시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자고 권면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영적인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권력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법 안에서 올바르게 서 있는지
늘 복음으로 비춰봐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 아래에서 판단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타락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권력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사람이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가서 왕위를 지킬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마저도 왕궁 발코니에서 본 밧세바에게 마음이 뺏겨서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잡으면 선한 일을 하겠다고 처음 약속했던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남용하고 있는데 급급해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이 세상의 권력은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권력을 맡기셨습니다.
문제는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힘을 가지고 어떻게 살지 말입니다.
오늘 아침 이야기입니다.
우리 오창연 장로님이 밖에 나가니까 안수집사 한 분이 또 도로변에 화단을 깨끗하게 혼자 땀 흘리며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장로님이 칭찬을 합니다. 목사님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 제 마음속에 든 생각이 저게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저 모습으로 가정 안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터전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가지고 먼저 내 자신을 희생하며
모든 이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그 모습,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 한 가지의 모습만을 우리가 갖는다면 어떤 측면 속에서 더 이상 이제 설교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누룩은 형체는 사라지지만 그의 희생으로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성경은 천국을 가루 서말에 부풀인 누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자리는 박수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가운데 사랑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스며드는 곳의 온도를 단 1도라도 높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누룩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세상의 다수의 흐름을 따라간다는 삶을 이미 포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진리의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가 나의 가치로 삼고 살아가겠노라 이미 선언을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길인 것입니다.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세상의 흐름이 아닌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 속에 스며들어서
더 나아가서 가정 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가정이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되는 하나님 뜻 안에 세워진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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