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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통해 지체 한 분 한 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머물기를 바라며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정성껏 정리하여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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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9월 20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 본문 : 로마서 1:15-17
설교 제목 : 다시 복음으로 2
설교 실황 :
[롬1:15-17]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은 우리가 로마서 세 번째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서... 시작을 해 놓고 보니 괜히 했구나 상당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했으니 끝을 맺어야겠죠.
요즘에 여러 단체로부터 들려지는 메시지를 보면
교회의 프로그램들이 여러 단계 속에서 개발되고 뜨거운 신앙의 열기가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일이면 모든 크리스찬들이 교회에 모여서 뜨겁게 예배를 드리고
수많은 봉사, 그리고 프로그램을 통해 훈련하면서 교회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고 헌신도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러한 열심이 있는데
그들의 영혼이 점점 말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더 쎈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는데 오히려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성도들은 평안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 고민을 해봅니다.
오늘 아침에 어느 권사님을 잠깐 불러놓고 제가 물었습니다.
권사님, 만약에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크리스찬이냐 크리스찬이 아니냐라는 것을 떠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강도 만난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을 도와야지요.
그래서 제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때 하는 이야기가 뭐냐? 거기서 제가 큰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알기 시작할 때 중요한 건... 내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내가 판단하게 되고 결국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느냐?
내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사람을 돕는 일은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고 하는 개인이 대입되기 전에는 복음적 사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면서 복음적 사고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까가 아니에요.
내가 볼 때에는... 이라는 마음.
거기서 느낀 것은 오늘의 교인들은 수많은 프로그램과 다양한 신앙의 모습 속에서 내가 가득차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상실해 버렸구나라는 것.
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기서 느낀 것이...
아 복음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 가운데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삶의 능력을
상실해 버릴 수밖에 없구나 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화려하고 세련된 예배... 오늘도 여러분, 우리가 예배 전에도 찬양을 부릅니다.
중고등부 아이들까지 참여해서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고 어떻게 하든지 더 풍요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지금도 저 주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또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고 할때,
정작 그들이 지녀야 될 십자가의 감격, 죄사함의 기쁨, 생명의 복음에 대해서 희미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신앙의 열심은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를 정죄하고 율법의 무거운 죄를 지우며 교회에게 분열과 피로감을 남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될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는 다시 십자가의 복음,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요.
처음 들었을 때는 가슴이 뛰던 이야기도 여러 번 들으면 익숙해집니다.
처음에는 감동했던 찬양도 매일 들으면 아무렇지 않은 듯하게 들립니다.
처음에는 감사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돼 버리고 맙니다.
복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처음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 때 십자가를 생각했을 때 제 모습 속에 비춰지는 것은
가슴이 뛰며 죽기까지 십자가를 붙들고 사랑하겠노라고 울며 찬양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구나... 그 사실 하나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십자가를 보아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수없이 부릅니다. 교회를 다닙니다. 성경도 읽습니다. 찬송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복음의 감격은 식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라
그들이 믿음이 전파된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이 오히려 좋다고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
여러분, 믿음이 좋은 교회라고 칭하는데... 그 교회에게 복음을 다시 전하기를 원한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해 드렸지만 복음은 모르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은 오늘 믿음의 사람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계속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난 시간에 익숙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에... 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의 기쁨이 사라지고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고 기도가 의무가 되고
예배가 습관이 되고 교회 생활이 형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에 복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앞에 강하게 선언합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복음은 단순히 종교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9세기 남태평양에 식인종이 살던 그 곳에 선교사가 찾아갔습니다.
그 섬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원수갚음 속에서 삶이 존재하기에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자 수십 년 만에 섬 전체가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무신론학자가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추장이 낡은 성경을 놓고 그것을 읽고 있습니다.
그때 무신론학자는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이미 현대 과학으로 미신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것인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책을 지금도 읽고 있습니까?
그때 추장이 그 학자를 바라보면서 웃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이 복음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당신은 저기 있는 무쇠 속에 들어가서 벌써 우리의 음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바로 복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와 평화롭게 대화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성경의 비밀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말은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교육은 사람의 지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환경은 사람의 생활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죄인이 의인이 되고 절망하는 사람이 소망을 갖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희망을 얻습니다.
미워하던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죄에 붙잡혀 살던 사람이 죄에서 돌아섭니다.
복음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게 됩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때 많은 분들이 예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다시 질문을 합니다. 구원이 뭡니까? 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것보다 더 훨씬 풍성합니다.
구원은 단지 죽고 난 이후에 천국에 가는 것,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늘 우리의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불안했던 사람이 평안을 얻습니다.
고독했던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원한과 미움으로 가득했던 사람이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 교회 안에서도 정말 복음이 뭔가?
뭉클한 감격을 누리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뜻이 맞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를 배척합니다.
참 가슴을 졸이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배척할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 교회 아니면 다른 교회 없나? 여기 아니면 신앙생활 할 수 없나? 다 떠나갑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성실하게 지켜 나가면서
여전히 모든 성도들을 살피고 섬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야! 이게 복음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껴안고 다시 걸어갑니다.
그래서 복음이 임하면 원한으로 가득한 모든 것들을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죄에 매였던 사람이 죄를 끊기 시작합니다.
술과 도박과 잘못된 습관에 빠져 있던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이 바뀌면서 가정이 바뀝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영혼만 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생활까지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 전체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복음의 능력이 없다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복음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여전히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비싸고 화려한 최첨단 스마트홈 저택이 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 수십 대의 에어컨과 최고급 음향기기, 조명, 시스템, 맛있는 것을 만들 수 있는 조리대... 모든 것들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집주인은 이 모든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기요금을 내지 않아서 전력이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스위치를 켜도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븐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집은 한여름에 찜통이 됩니다.
집 자체와 가전제품...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지만 그 기능을 잃어버린 채 방치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연륜, 직분, 종교적인 열심은 화려한 가전제품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 영적 전력선이 차단되면 복음의 원초적인 능력은 우리 안에서 작동을 멈추게 됩니다.
형식은 남지만 실제적인 변화와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뎌집니다.
말씀을 잃어버리면 복음의 감격이 약해집니다.
죄를 품고 있으면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막혀 버립니다.
복음을 듣지 않으면 복음이 낯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오래 했는데 힘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는데 적어도 우리는 3~4대째 신앙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가정이라고 하는데 예수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달고 다니고 있는데 십자가의 사랑이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데 제가 정말 절박하게 느끼는 게
교인처럼 진짜 용서하지 않는 아주 고질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교인들에게 한번 찍히면 끝장이다.
그러니 여러분, 그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겠습니까?
오늘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믿음이 없습니다.
전도해야 하는 것 아는데 전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짖고 말하고 있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왜 십자가가 그렇게 많은데 왜 사람들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멀어져 있을까?
문제는 십자가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한번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 전에 김홍한 목사님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혹시나 손에 쥘 수 있는 십자가가 없을까 해서 수십 개를 받아왔습니다.
십자가는 교인들에게 매일 공급되고 있고 쥐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성령을 말합니다. 구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노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미움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욕심도 그대로 가지고 있고
판단하는 것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도 못합니다. 전도도 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복음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사실을 다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작은 탄광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마을의 한 아버지는 늘 술에 빠져서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 아버지의 아들은 주일 학교에서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믿음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버지가 광부로서 일하던 탄광이 무너져서... 극적으로 그 아버지가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날 하필이면 그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극에 비극이 겹친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와서 슬픈 마음을 안고 아들이 보았던 성경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가지 메모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는 예수를 잘 모릅니다. 매일 술만 마십니다.
제발 아빠를 불쌍히 저 천국에서 아빠를 꼭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그 글을 읽은 아들의 성경책을 품에 안고 굵은 눈물을 쏟아냅니다.
자식의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랑의 기도가
자신의 강퍅한 마음을 부셔뜨렸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아들이 믿던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이 이야기는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면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향한 뜻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감격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내 가족에게 전하고 싶어지고
내 자녀에게 전하고 싶어지고
내 친구에게 전하고 싶어지고
내 이웃에게 전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복음을 너무 오래 들어서 익숙해졌습니다.
주님, 다시 복음을 듣게 해 주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깨닫게 해 주십시오.
구원의 감격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다시 부어 주십시오.
그래서 나만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복음을 다시 들읍시다.
복음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십시다.
복음의 능력을 다시 붙드십시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열매를 맺고 살아갑시다.
여러분 이 한 말씀만 여러분들이 꼭 간직하고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마서 1:16)
이 고백을 가슴에 품고 이 고백 속에서 오늘의 삶을 살아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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