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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 에베소서 4:22-24 윈도우 XP 익스플로러8 에서는 지원이 되지 않습니다. 윈도우7 이상 지원됩니다. 윈 XP 환경에선 구글크롬(Chrome)을 설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원가능 환경 : WINDOWS7 이상(익스플로러9이상), 크롬, 사파리
설교말씀을 mp3로 듣기 쉽지 않은 상황의 지체들을 위해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최대한 정리하여 싣습니다.^^ ---------------
일시 : 2022년 7월 24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본문 : 에베소서 4:22-24
설교제목 :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
설교실황
[엡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루를 지나서 한 주간을 지나서 여러분의 얼굴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은혜라는 것을 느끼는 오늘 아침입니다.
서로 마주 얼굴을 대하고 눈빛을 마주 대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큰 벌이 없을 것 같습니다.
눈은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관계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살짝 흔들립니다.
섬뜩한 눈, 이글거리는 눈, 초점을 잃은 눈과 마주하는 것은 힘듭니다.
진실하고 따뜻한 눈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집니다.
눈빛 밝은 자유인이 되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킬 수 있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길모어 목사님이 마을을 지나다가 좌판을 벌리고 물건을 팔고 있는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그에게 전도하려고 다가갔습니다.
길모어 목사님을 말했습니다. 장사가 잘 되십니까? 예수 믿습니까?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습니다.
노인은 놀라면서 예수 믿는 것보다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길모어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구원해주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입니다.
인생에서 누구와 동행하느냐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죽음을 넘어 영원히 동행할 대상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있어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영원한 생명의 길인데, 우리가 썩어 없어질 길로 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실 수 없습니다.
에녹을 생각하면 동행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65세에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관심을 갖는 것은 왜 무드셀라를 낳고 동행했을까? 입니다.
이 말씀은 에녹이 그 이전에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무드셀라’는 ‘창을 던진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 뒤에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에녹이 아들을 낳은 후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심판을 생각하니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심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심판입니다.
오늘날 죽음 앞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무엇입니까?
렘브란트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그림을 잘 그려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족과 부족한 것이 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복이 하루 아침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붓도 내려놓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린 그림이 나이트워치였습니다.
나이트워치라는 작품은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의 값을 물어보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무엇인지 체험하면서 그린 그림이기에 값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18종의 성서 번역본을 구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에서 부활의 약동하는 모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가 행복했을 때에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인생의 허무함과 좌절함을 느끼면서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를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순간에 달라졌습니다.
동행했다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동행은 일치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동행하려면 두 사람이 뜻이 맞아야 합니다.
프란체스코가 그의 제자 네오날드와 함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네오날드는 귀족의 아들이었으며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존심을 자주 내세웠는데 그로 인해 공동체가 자주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 네오날드에게 그 날에도 마음에 불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아무리 영적인 스승이라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성장배경을 가진 이 사람을 귀족인 자신이 나귀에 태우고 다녀야 하는가? 라는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그 때 네오날드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오날드의 마음에 불평이 가득하다라는 것을 성령의 인지함가운데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에서 내린 후 형제가 타고 가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네오날드는 길에 엎드려서 자기 마음에 있었던 시기와 불평을 고백했습니다.
일치할 때 동행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주님께서 내 뜻대로 동행해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기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동행해야 합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공통분모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새사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습을 벗고 예수님의 보혈로 새로움을 받고 ..
옛사람은 방탕하고 세속적인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해도 하나님은 그를 떠나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성격과 같도록 하려면 우리는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내어다버리고 성령충만함을 갈구해야 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이 찾아옵니다.
동행은 우리의 삶의 작은 혁신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실상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서기 1,100년경에 어느 무명의 작가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온 세상을 바꾸는 게 어렵다는 걸 알고 나서 우리나라부터 바꾸려고 했다.
우리나라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동네를 바꾸는 데 집중했다.
나는 우리 동네 또한 바꾸지 못한 채 나이가 들었고, 내 가족을 바꾸려고 했다.
이제 노인이 되어 보니 내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 자신이란 걸 깨달았다.
만약 그 때 내가 나를 바꾸었다면 우리 가족을 바꾸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와 내 가족이 변하면 우리 동네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우리 동네가 바뀌면 우리나라를 바꾸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는,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자신을 개혁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의 혁신은 예수님과 동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가 안되고 동의가 안되면 다 떠납니다.
예수님과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위기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자가 다 이기적이거나 세속적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 뿐입니다.
자신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교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따뜻한 사귐이 없어서 거기에 실망해서 떠나는 것은 교회가 반성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들이 믿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떠난다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부단하게 영적인 복음의 내용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에 집중하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에 충실하든지 떠나든지 둘 중에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행은 시작입니다.
의와 진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동행을 시작할 때 비로소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행은 능력을 받아 가는 길입니다. 동행은 결단입니다.
결단은 믿음 자체는 아니지만 믿음이 있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주여 주여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지만
동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 나온 한 시입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날이 어두워도 갈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들판도
지날 수 있고 위험한 강도 건널 수 있으며
높은 산도 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손 내밀어 건져 주고
몸으로 막아 주고, 마음으로 사랑하면
나의 갈 길 끝까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야 하며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나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동행의 기쁨이 있습니다
동행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동행에 감사하면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 누군가와 손잡고 걸어갑시다
우리의 위험한 날들도 서로 손잡고 건너갑시다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이것이 동행의 의미입니다.
영국에서 이색적인 공모를 했습니다.
영국끝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차, 자동차, 비행기.. 등 답이 나왔습니다.
그 중 1등은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누구 손을 붙잡고 가는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손을 붙잡고 가면 아무리 먼 길도 가까운 길이 됩니다.
아무리 우리의 세상이 희망이 없어보이고 힘들고 거칠고 험난해도
우리 주님의 손을 붙잡고 동행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을 닮아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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