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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한복음 14:27 윈도우 XP 익스플로러8 에서는 지원이 되지 않습니다. 윈도우7 이상 지원됩니다. 윈 XP 환경에선 구글크롬(Chrome)을 설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원가능 환경 : WINDOWS7 이상(익스플로러9이상), 크롬, 사파리
설교말씀을 mp3로 듣기 쉽지 않은 상황의 지체들을 위해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최대한 정리하여 싣습니다.^^ --------------------
일시 : 2022년 8월 14일 오전 11시 주일예배
성경본문 : 요한복음 14:27
설교제목 :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유대교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가 쓴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도시를 통과하려면 매우 가파른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길은 벼랑위에 있는데 꼬불꼬불하여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떨어져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마을의 장로들이 모여서 논의를 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 즈음에 결론을 내립니다. 벼랑 밑에 병원을 짓자고 말입니다.
근시안적인 결론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짧은 하나의 모습으로 그것을 고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경제적인 문제입니까?
아니면 인간사이의 갈등의 문제입니까?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적 문제도 아니고 인간 갈등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늘 성경이 가르쳐주는 인생의 근본적 문제는 바로 평안의 문제입니다.
평안은 인간이 갈구하는 영원한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처음 만나셨을때 물으신 내용은 ‘평안하냐’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씀하신것이 ‘평안할지어다’였습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관심사는 사람의 마음가운데 어떻게 평안을 심어주느냐 였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요한복음 14:26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이 주는 평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는 것은 근심거리입니다.
근심이 해결된다고 다 해결됩니까?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무엇인가를 얻지 못해서 근심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풍부한 돈을 원합니다.
목회하는 중에
저는 언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언제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라고 제게 질문을 던지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잠시는 그 얻은 것이 평안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집니다.
결국 그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또 다시 불안가운데 빠져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된다구요.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신앙의 문제를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해야 할 권리는 헌법에 나와 있을 만큼 중요한 권리입니다.
행복은 마음에 몸의 요구가 충족될 때 나타내는 상태를 말해줍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흐뭇한 정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 행복의 최대의 적은 욕심입니다.
소유욕은 모든 것을 채울 수 없는 밑빠진 독입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음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4세기의 위대한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수많은 방황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는 청년때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나 카르타고로 갔습니다. 그는 로마의 철인 키케로의 신플라톤 사상에 몰입하기도 했고 친구의 권유에 따라 마니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며 인생의 허무를 뼈저리게 느꼈고, 또한 방탕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에도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밖에서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집어서 읽으라'는 노래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로마서 13장 12줄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이 크게 확대되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씀을 읽고 회심한 이후에 고백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가지 평안이 없다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존스타인 벡의 진주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가난한 부부가 바닷가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어느날 아름다운 진주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부는 이제 제대로 결혼할 수 있고 제대로 자식을 낳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몸이 아빠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그들이 회복되지 못하도록 처방을 합니다.
도둑이 들기도 하고 이웃들이 부를 나눠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신부는 성당에 좀 더 헌금할 것을 바랬습니다.
부부는 기쁨이 사라지고 밤마다 공포가 엄습해 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결국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 진주를 바다에 던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솟아나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고난을 가장 많이 당한 인물을 욥이라고 말합니다.
욥기를 지혜서라고 말합니다.
고난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받은 것, 주는 것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제대로 거하면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옥안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구름을 보면서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땅만 바라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며 원망과 자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출소하였습니다.
하늘을바라보며 시를 쓴 사람은 시집을 내고 큰 기쁨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자학하며 원망과 불평속에 있었던 사람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평안을 누립니다.
환경에 휩쓸리는 사람은 마음에 걱정거리가 떠날일이 없지만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고난가운데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빌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호수아 라프맨’이라는 소설가가 쓴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에 보면
주인공이 소원을 들어 주는 노인을 찾아가서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노인이 젊은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물으니까
이 젊은 사람은 대답을 합니다. “예, 할아버지 건강을 주세요. 건강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으니 건강을 주십시오.
돈을 주십시오. 돈이 있어야 자동차도 사고 예쁜 집도 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예쁜 얼굴을 주세요. 재능을 주세요. 권력을 주세요. 명예를 주세요.”
“또 없는가?” “예, 없습니다.”이 청년의 이야기를 다 들은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이여, 그것들이 자네를 만족시킬 수 있는 줄로 아는가? 절대 그렇지 않네.
자네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어느 것 하나도 즐길 수가 없는 것일세.”
평안이 모든 것들은 허상입니다.
평안이 있으면 이 모든 것은 절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는데도 못받는 것은 어리석거나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인이 되었지만 이어령 박사는 한국지성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이어령 박사에게 왜 교회를 가느냐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어령 박사는 이야기했습니다.
배고프면 식당에 가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놀아도 심심하고 배워도 답답하면 어디에 가야하나요?
영혼이 메마른 사람이 찾아갈 곳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부패했다고 나는 교회를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병원이 오진한다고 죽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혼에 목마른 사람이 찾고 싶은 곳이 교회이길 바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선교사 존 맥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항상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려면 그는 강도와 도둑들이 나오는 어둡고 위험한 길을 2킬로미터나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는 어느 토요일 밤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날 내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을 때는 자정이 지나서였습니다. 마을에서 2킬로미터나 떨어진 길은 전보다 더욱 험하게 느껴졌습니다. 좌우로는 숲이 우거진 높은 언덕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16살이었습니다. 나는 정신없이 빨리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방 20미터쯤 되는 곳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죠니냐?’ 너무나 놀라서 순간적으로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나는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밤이 깊도록 집에 오지 않는 자식을 찾아 나온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어두운 주위가 마치 환해진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나와 함께 걸었습니다. 그날 밤에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진리의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환경이 좋지 않아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이닙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느낌, 임재의 그 사실을 체득하지 못하고 읶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제 시간의 모든 날들을 돌이켜보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잘못된 인생의 모든 모습들이 열거되면서 참으로 아픔을 느끼는 모습, 그것을 날마다 느껴봅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 또 하나 되집어 보는 것은
힘겹고 어두었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잊고 살아올 수 있었느냐입니다.
가장 중요했던 사실은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다는 느낌 속에서 그 모든 날들을 딛고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요청합니다.
성령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경험을 하십시요.
그러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에 민감한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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